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2010년 보르도 여행기(1) - 보르도를 거쳐 메독까지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에서 출발한 기차는 약 30분만에 프랑스 서남부의 국경 도시인 엔다예(Hendaye)에 도착합니다. 기차에서 내리니 중무장한 군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여권 검사를 합니다. 순간 사람들 분위기 '싸' 해집니다만 여행객 입장인 저희야 국경 통과 세레머니일 뿐 입니다.
프랑스 엔다예 역 도착입니다
이곳 엔다예 역에서 2시간을 기다려 보르도행 기차를 타야 하는데 뭐 달리 할게 없었습니다. 역사 앞에는 식당이 몇 개 있긴한데 제가 원래 역전앞 식당을 안가는 스타일임에도 워낙 할일도 없고 출출하기도 해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역전 앞 풍경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좀 헷갈리더군요. 이 요리들이 프랑스 소속인지, 스페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바스크라고 해야 하는지. 아무튼 아는 메뉴가 빠에야 밖에 없어서 그걸로 주문했는데 뜻밖에 맛이 괜찮았습니다. 편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찰라 주인 아주머니가 제가 먹고 있던 빠에야에 홍합을 듬뿍 넣어줍니다. 서비스인가 했더니만 요리할 때 홍합 넣는걸 깜빡했다고 하는군요. lol…
홍합없는 빠에야도 맛있었다는… 항아리는 상그리아 병
다시 출발한 열차는 프랑스 서부 평원을 가로 질러 북으로 달립니다. 오전 중에 내리던 비도 그치고, 보르도에 가까워질수록 날씨도 화창해집니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무지개.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유럽 여행 갈때마다 무지개는 보증 수표
출발한지 2시간30분 후 드디어 보르도(Bordeaux) 생 장(Saint Jean)역에 도착합니다. 사실 보르도 시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터라 생 장역이 이렇게 큰 역인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역사의 구조도 모르고 엄청난 인파에 방향 감각도 잃고 해서 좀 헤멘끝에 간신히 렌터카 사무실을 찾아서 예약해둔 차를 픽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시트로엥 D130 입니다. 발표된지 얼마 안된 신차라서 그런지 조작성이나 승차감이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수동 기어 조작도 전혀 문제가 안되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ㅎㅎ
이 차 뒤태 봤어요? 안 봤으면 말구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보르도 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메독(Medoc) 지방의 작은 호텔입니다. 여기를 가려면 일단 보르도 시내를 빠져서 외곽 순환 도로를 타다가 지방 도로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합니다. 문제는 보르도 시내의 교통 정체였습니다. 차량이 많은것은 그렇다고 해도, 도로 구조가 너무 복잡한 탓에 네비게이션의 지시가 계속 한박자씩 늦었습니다. 할 수 없이 네비게이션 끄고 아이폰 나침반 앱의 도움으로 무조건 북쪽으로만 달린 끝에 시내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상 시간을 한참 넘긴 저녁 8시나 되서야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은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르 흐레 드 리스트락(Le Relais de Listrac) 라는 호텔입니다. 이곳에 대한 인터넷의 평가는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객실과 침대는 너무 작았고 트렁크를 옮기기에 낡은 계단과 복도는 너무 좁았습니다.  따뜻하게 맞아준 주인 아주머니마저 없었다면 정말 꿀꿀했을 겁니다. 
정말 소박했던 농가 호텔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이 호텔이 꽤 훌륭한 식당을 겸하고 있다는 현지 로컬의 평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적중했습니다.
식당도 소박해지만 맛은 대박
사실 음식 주문도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어가 전혀 안통할 뿐 아니라 영어 메뉴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프랑스어로 씌여진 메뉴는 과도한 흘림체 때문에 무슨 글씨인지 알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머리 속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암호를 풀고, 추리력과 상상력을 보태 주문이 들어갑니다. 

먼저, 와인은 이 지역 와인인 샤토 포카스 두프레(Chateau Fourcas Dupre) 2005년 입니다.  크뤼 부르주아(Cru Bourgeois)급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멜롯이 각각 44%씩 블렌딩된 와인입니다. 확실히 스페인 와인과 구별되는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Chateau Fourcas Dupre 2005
잠잘 곳이 바로 위에 있다는 심리적 안정 때문인지, 아늑한 식당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친절의 화신인 주인 아주머니 때문인지 식사하는 내내 편안하게 즐길수 있었습니다. 

몇가지 기억에 남는 음식입니다.  먼저 와이프가 시켰던 새우와 관자가 들어간 크림 스프.
숟가락이 낯익다
제가 에피타이저로 선택한 판체타(Pancetta) 요리입니다. 메뉴판에서 유일하게 아는 단어가 눈에 띄길래 골라본 것이었는데 대만족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식사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음식을 다루는 기교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냥 전통적인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변주를 시도하면서 음식의 다양성을 확장한다는 느낌을 매번 받습니다.
촛점이 안맞아요
저의 메인 요리는 쇠고기 스테이크였습니다. 이것 또한 별미였는데, 미국식의 두툼한 스테이크가 주는 살살 녹는 그런 맛이 아니고… 살코기, 힘줄, 지방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그러면서도 굵은 소금으로 단순하게 맛을 낸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1인치 이상 되어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
식사를 늦게 시작한 덕에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나니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졌습니다. 배부르고 따스한데다,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과 와인의 취기까지 올라오니 베게에 머리만 닿아도 곯아 떨어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옆의 손님들은 끝날려면 한참 멀어 보이더군요. 방으로 올라가서 얇은 벽을 타고 들리는 아래층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면서, 재네들은 잠도 없나를 생각하다 꿈나라로 빠져듭니다.
내가 네 기분을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