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31일 일요일

2010년 보르도 여행기(4) - 생 테밀리옹 이야기

사실 이곳을 들르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생 테밀리옹(Saint Émilion)은 그저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이라던가 샤토 오존(Chateau Ausone)등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유서 깊은 와인 산지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이 마을과, 바로 옆 마을인 포므롤(Pomerol)의 와이너리나 구경할 생각으로 하루 쯤 묵기에 적당한 호텔을 알아보고 있던 중, 이 마을이 통째로 1999년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갑자기 호기심이 급 상승하면서 이곳에서 2박을 묵기로 계획을 급 변경합니다. 호텔 예약에는 다소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마도 시간이 촉박한데다 주말을 끼고 있어서 그랬지 싶습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는 전부 방이 없다고 나오는 통에 직접 호텔에 연락했더니 별관에 남이 있는 방이 있는데 쓰겠냐고 합니다. 그땐 무슨 얘긴지 했었는데 도착해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호텔의 메인 건물과 완전히 독립적인 2층 짜리 건물의 키를 내어줍니다.


숙소 베란다에서 본 거리 모습
짐을 풀고 슬슬 동네 구경을 떠나봅니다. 좁고 구불 구불한 돌길은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느낌을 줍니다.
보기보단 무지 가파릅니다 - 하이힐은 재앙
이 동네는 신축이나 개축을 할 때도 반드시 석회암을 사용하고, 색상을 일치시키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2010년 오늘 날에도 1,000년도 더 된 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숙소가 있는 쪽에서 마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벨 타워쪽의 풍경을 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벨 타워 주변엔 5성 호텔, 미슐랭 식당, 관광 안내소, 노천 카페가 있어요
마을 어디를 봐도 한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보르도시의 건축물들도 이곳 화강암으로 지었대요
한편 마을 바깥 쪽으로 눈을 돌리면 포도밭으로 둘러쌓고 외곽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멀리 남쪽엔 도르도뉴 강이
샤토 밀집도가 꽤 높아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선 골목 골목마다 위치한 와인샵들이 눈에 띕니다. 와인 리스트를 얼핏 보니 고급 와인들이 빈티지까지 완벽하게 갖춘채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문을 하면 항공편으로 집까지 배달을 해준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네 와인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설레발이 재미있습니다.
한국으로는 안되겠지요
그 밖에 공예품 가게, 전시장 등 볼거리도 꽤 있었고,  마카룽 가게, 카페, 바, 레스토랑 등먹고 쉴 환경도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전통 마카룽은 생각보단 별로
그런데 진짜 생 테밀리옹을 보려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소위  ‘겉’ 모습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반쪽에 해당하는 ‘속’ 모습은 지하에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벨 타워가 서 있는 땅 지하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모놀리식(Monolithic) 교회가 그 주인공입니다.
입구로 가려면 급 비탈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와야
모놀리식이란 단일 (화강암) 석재를 말합니다. 보통의 건축물은 벽돌이나 가공된 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건물을 완성하는데 반해서, 모놀리식은 거대한 암석을 안에서부터 파내면서 건물을 완성하는 구조입니다.
문을 들어가면 사진 찰영은 금지
이쯤에서 잠시 역사 공부를 하겠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요약하면:
  • 8세기 중반 에밀리옹(Emilion)이라는 수도승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 암석에 동굴을 파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삶을 살자,
  • 그의 선행을 따라고자 하는 수도승들이 이 지역세 집결하여 그를 따르기 시작함.
  • 에밀리옹이 죽자 그를 성자(Saint)라 부르고 마을을 생 테밀리옹으로 명명.
  • 후세 은자들이 기적을 행하자 더 많은 사람과 수도승이 집결하면서 번성함.
  • 12세기에는 더 이상 밀려드는 사람을 수용하지 못해 요새화가 됨 (성벽과 타워).
  • 11~13세기에 에밀리옹의 초기 동굴을 확장해서 지금의 모놀리식 교회를 완성.
  • 13세기부터 영/불간 전쟁에 휩쓸려 양측 모두의 약탈의 대상이 되면서 황폐화.
  • 19세기 중반까지 방치되다가 이후 와인 산업이 뜨면서 다시 각광을 받음.
가이드를 따라 좁고 가파른 지하 동굴의 층계를 내려가니 수도승 에밀리옹이 살았다는 작은 공간이 나옵니다. 작은 샘물이 나는 공간도 있고, 수행하던 기도실, 침실과 의자터 등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쪽 끝자락에 나무로 된 문이 있길래 물어보니까 어처구니 없게도 그 문 뒷 공간은 와인샵이라고 합니다. 하마터면 귀중한 문화 유산이 와인 창고로 쓰일 뻔한 것이었지요.

에밀리옹의 거처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출입구로 들어가니 모놀리식 교회로 연결됩니다.  도저히 이곳이 단일 석재라는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생각보다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닥 면적은 60x20 미터 정도되고 높이도 10 미터를 상회하더군요. 커다란 예배실과 선택받은 자의 무덤이 있었고 예배당 천장에는 트리티니 조각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꽤 충실하게 이곳 저곳을 설명해 줍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돔형 천장과 그 주변 기둥을 온갖 서포터로 지지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얘기인즉슨 이 지하 교회 바로 위에는 벨 타워와 5성 호텔이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벨 타워의 무게 중심이 지하 교회 돔 아치의 무게 중심과 일치하지 않는 바람에 하중 분산에 문제가 발생해서 이런식으로 임시 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비밀을 공유한 사이처럼 동네의 모든것이 새롭게 보이는군요.
사연이 많은 동네였구나...
어둠이 내리자 마을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상점이나 카페는 문을 닫는 대신 레스토랑이 일제히 불을 켭니다.  굳이 식사 생각이 없다가도 좁다란 골목을 타고 퍼지는 음식 향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치명적인 마력을 발휘합니다. 한국에서의 프랑스 요리는 웬지 고고하고 까탈스러운 느낌을 받곤 했었는데, 이곳에 오니까 가정식 백반처럼 친근함으로 다가 옵니다.

7시30분쯤 되니까 사람들이 식당으로 모여 들기 시작합니다.  첫날인 오늘은 사람들이 제일 북적거리는 식당을 선택해 봅니다.  토요일 저녁 시간이라 자리가 모자라 보였는데 곧 능숙한 솜씨로 야외 테라스에 공간을 마련해서 식탁을 차려 줍니다.
요로큼 생겼지요
제가 메인 요리로 선택한 것은 Veal 이라고 부르는 어린 송아지로 만든 요리입니다. 생후 4개월 미만의 도축된 송아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직 고기 색깔이 빨갛게 변하기 전 단계입니다. 당연히 더 연하고 섬세하며 지방이 없습니다. 소스와의 조화도 훌륭합니다. 먹는 내내 어쩜 이런 맛이 나올까 감탄하면서 아껴 먹었습니다.
veal은 16주 미만 송아지, calf는 5개월 이상된 송아지, beef는 어른소
와이프의 메인 요리는 Maigre 라고 부르는 생선 요리였는데, 처음으로 먹어 본 맛이었습니다. 맛이 하도 인상적이길래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다시 먹어볼까 해서 생선 이름(Maigre)를 적어 왔습니다. 구글링을 해보니까 프랑스 여행 중에 맛을 본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와서 이 생선을 찾고 있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게 뭔지 아무도 - 프랑스인도!!! -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프랑스 요리 전문가가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지중해산 농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생선 이름이라는게 지방마다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아서 혼란이 생긴다는 설명과 함께.

물론 와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지역 와인인 샤토 트라포(Chateau Trapaud) 2001년산을 한병 깠습니다. 멜롯 70%, 카베르네 쇼비뇽 20%, 카베르네 프랑 10%가 함유된 와인이었는데 생각보다는 묵직하고 알코올맛도 강한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테라스에서의 저녁 식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조그마한 식당에서 비교적 간단한 코스 메뉴를 먹었는데도 2시간을 훌쩍 넘겨 버립니다.
디저트는 마카룽으로
둘째 날의 저녁은 Le Clos du Roy 라는 식당에서 했습니다.  원래 이 날의 계획은, 저녁은 최대한 가볍게 때운 후 시간을 확보해서 밤에는 야경이나 구경하면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마을 중심지에서 좀 떨어진 없어 보이는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밖에서 보니까 내부에 테이블도 몇개 없고, 골목길에서 삐끼질 하고 있던 쥔장도 검소(?)하게 생겼길래 이거다 하면서 들어갔습니다.
수수한 외관
그리고 나서 1분. 우리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니 이런... 넓직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홀이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주 제대로 된 레스토랑을 고른 것입니다. 가벼운 저녁의 계획은 사라지고 또 다시 만찬을 즐겨야 하나 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뭐 즐기는 수 밖에요. 오늘은 아예 식전주(아페르티보)부터 시작해봅니다.
아싸. 또 먹어보자
오늘의 와인은 소믈리에에게 부탁해 보기로 합니다. 여기 소믈리에는 아주 별종입니다. 행동이 나무늘보와 한판 겨뤄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느림보입니다.  게다가 웃음기 없는 얼굴에 항상 거만한 표정을 하고 다녀서 우리가 건방진 소믈리에라고 별명을 붙여 줬습니다. 그런데 와인에 대해서는 도사십니다. 와인 리스트를 꿰뚫고 있으면서 줄줄 읖조리는데 도무지 막힘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 친구의 추천 와인 중의 하나인 클로 데 자코뱅(Clos des Jacobins) 2006 을 먹어 보기로 합니다.  완전 슬로우모션으로 디캔팅 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더니 와인의 밸런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품종을 물어 보니까 ‘멜롯’이라고 한 마디를 하고선 씨익 웃는군요. 소믈리에의 자긍심이란…
멜롯 75%, 카베르네 프랑 23%, 카베르네 쇼비뇽 2%
휘돌리기가 정말 잘 되던 잔
요리는 기대 이상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음식에 대한 철학은 ‘모든 음식은 평등하다’ 였습니다. 음식은 곧 문화이고, 문화는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최적화되도록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 것이 좋고 나쁜게 없다는게 제 지론이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식사를 하다보니  ‘프랑스 음식은 우월하다’라고 생각이 변하는 듯 합니다.  다른건 몰라도 기교와 다양성을 따라갈 요리가 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시작은 푸아그라로 시작해서 새우 샐러드로 연결 됩니다. 생선 요리는 도미를 내어 주는데 곁드려 나오는 가니시(Garnish)가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운 배추에 발사믹은 누구 생각이었을까
오늘의 메인은 오리 구이와 카네로니(Canelloni)입니다. 처음엔 담백한 식감과 달달한 풍미에 ‘이게 오리가 맞아?’ 할 정도로 감탄스러웠고,  씹을수록 되살아나는 원래 고유한 오리의 맛이 뒷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아... 보고 있으면 향기가 난다
디저트로는 치즈 모듬과 마카룽입니다.
디저트는 계속 마카룽으로만 달립니다
주체못할 포만감으로 식당을 나와,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호텔로 가면서 생각해 봅니다. 
"살라고 먹는 것도 아니고, 먹을라고 사는 것도 아니다. 주니까 먹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러나 너무 배부른…생 테밀리옹의 밤입니다